같이 생기부 탐구할래?에서 시작된 도비 모임은 "좋은 생기부"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동기부여가 되어주었다. 누군가와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 하나만으로도.
그중 핵심 인력이었던 ㅇㅂ도비는 다른 도비들의 조력 없이도 혼자 훌륭하게 성장해서 우리의 빛이 되어줌. 그냥... 그 도비는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하기로...🙄 (참고로 도비는 쌤의 대체어입니다. 여기서만.)
아무튼 좋은 생기부 고민의 시작점은 데이터 교실이었다. 융합 탐구를 의도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나, 애들의 주도성과 탐구 노력이 드러나는 생기부를 위해서 방향성을 잡아주고 피드백을 (될 때까지)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교육했다.
ㅇㅂ도비의 피드백을 위한 노력을 보면서 나도 스스로를 담금질도 해보고... 아무튼 굉장한 경험이었다.
애들도 질리도록 교사와 미팅하느라 진이 다 빠졌지만, 그 어떤 활동보다 애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교사 피드백의 중요성을 잘 이해한 듯하다. 단순히 탐구를 n빵하는게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가며 협력하는 모습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어서 너무너무 소중한 교육 시간이었다.
생기부를 쓰고 몇 달이 지나 다시 아이들을 고민하게 된 건 모의면접 준비였다. 본인 생기부지만 방향성을 잃고 대답하는 모습들에 머리가 아팠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답답해서 진짜 지끈거렸다 ㅋㅋㅋㅋㅋ) 학생부 종합 전형 1차를 붙었으니 학생을 확인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생기부였을텐데, 생기부 속에 드러난 학생과 모의면접 연습을 하는 학생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또 고민했다. 뭐지?
그리고 그 고민을 끝내고 나는 마지막 프로젝트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취향'을 선물해보고자 마음 먹게 되었다.
1. 데이터교실
학생 모집
노션으로 진행했다. ㅇㅂ도비와 올해 열심히 쓰고 있는 툴 중 하나다. 학생들의 보고서를 한 눈에 보고 바로 피드백할 수 있고, 여러 팀의 것을 내가 보기 편하게 나열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협업툴이기 때문이다.
공지부터 노션으로 안내하면 학생들도 노션으로 활동 진행 사항을 공유해야 한다는걸 빠르게 받아들인다. "아, 저 선생님이 저런 스타일이구나!"하고. 애들은 흡수가 빠르다.
저렇게 적어두면 애들이 우와우와 뭐가 있나보다하고 일단 참가한다.
활동 운영을 하면서
학생들과 자주, 오래 소통했다. 생기부를 써주면서 ㅇㅂ도비와 공감했던 부분은 학생들 대부분이 '자아'가 흐릿하다. 없는 수준인 애도 있다.
나는 항상 애들에게 진로 희망 사항을 문장의 형태로 떠올리거나 적어보라고 강조얘기하는 사람이다. 교사가 되고 싶은 애들이 다 똑같은 이미지의 교사를 떠올릴 리가 없다...는게 나의 생각이었는데, 대차게 틀렸다는 사실을 피드백을 하고 생기부를 쓰면서 깨달았다 ㅋㅋㅋㅋㅋ
ㅇㅂ도비도, 나도 늘 애들을 피드백하면서 물었다. "이거 알아서 뭐할건데? 니가 관심있는게 뭔데?"
'뭐'와 '관심'은 구체적 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가령 간호사가 되고 싶은 학생은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삶의 어느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분명히 — 우리가 사회적 동물인 이상 당연하게도 — '사람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에 어떤 의미 부여를 했겠지. 남을 돕는게 좋다는 이유보다 더 깊이 있는 의미부여를 했을 거다. 남을 돕는건 간호사가 아닌 다른 직업으로도 실현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학생들의 그런 부분이 궁금했고, 질문했고, 대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고교학점제란 자신이 그나마 잘하는 유형의 과목을 고르느라 본인을 괴롭게 만드는 제도였고, 탐구 활동은 생기부를 채우기 위한 자료 짜집기 시간이었고, 진로 희망 사항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직업을 고른 결과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구체적인 취향과 문장 형태의 꿈을 꾸던 나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처음 뼈저리게 느끼고 잠깐 좌절했다.
어떻게 물어보고 보여줘야 애들이 하고 싶은게, 뚜렷하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게, 세상에 궁금한게 생길까?
당장 아이들의 생기부를 잘 써주고 싶은 나는 결국 데이터 교실에서 강제로 애들에게 "방향성"을 안겨주며 피드백했다. 물론 실패한 케이스도 많지만.
내 삶의 방향성은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공정, 정의, 따뜻함과 다정함이 주류인 사회가 되도록 기여하고 싶다는 쪽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나 외에 더 많은 사람이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가장 효과적인게 10대를 교육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교사를 택했다. 결정적으로 나는 고2 담임 선생님께 다정한 마음을 배운 적이 있다. 내가 배운걸 가르치고 싶다고 늘 생각한다. (그 경험 전까지 나는 글의 아름다움에 심취해서 이걸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작가 겸 통번역가를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애들의 생기부 방향성도 '공익에 기여하는 or 도움이 필요한 개개인을 돕는 어떤 방법들'로 잡아주었다.
물론 만족하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애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2. 모의면접
경영학과, 그게 도대체 뭔데?
경영학과를 희망해서 종합 전형에 지원한 학생이 1차를 붙고 면접 기회를 얻게 되었다. 꼬리 물기 질문을 하는 곳이라 하여, 학생의 담임인 ㅇㅂ도비의 부탁을 받고 면접을 봐주기로 했다.
첫번째 모의 면접은 대차게 망했다. 애는 본인 생기부지만 모르는게 너무 많았고(9할), 나는 답답함에 애를 좀 다그치게 되었고, 1시간 가량 내게 시달린질문당한 애는 얼굴이 빨개져서 본인 교실로 돌아갔다. 일단 생기부를 공부해오라고, 공부 방법을 알려주었다.
경제와 통계로 범벅된 생기부지만 애는 경제나 확통을 들은 적이 없고(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음...) 경제 개념을 물어도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틀 뒤에 다시 모의면접을 보았다.
첫날에 해보니 얘는 아는건 제법 편하게 말하고, 편한 느낌일 때 더 정확한 단어가 훨씬 잘 나오길래 전략을 수정했다. 편하게 말하는 연습을 많이해서 면접장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걸로.
그래서 건너편이 아닌 바로 옆에 앉아서 생기부를 같이 펼쳐놓고 보면서 하나하나 묻기 시작했다. 물으면서 알았다. 얘도 자기가 뭐가 되고 싶은지가 없어서, 아는게 있어도 어떻게 써먹을지 모르는구나!
생기부엔 경제+통계+경영 전략이 많았고, 내용을 종합하면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영 컨설턴트.. 정도로 보이는데 정작 얘는 그게 아닌거다. 그러면 당연히 누가 봐도 '타인이 만들어 준 생기부'인거잖아? 눈 앞이 캄캄했다 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너만의 가치관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삶의 방향성이 없는데 의사결정할 때 뭘 근거로 삼고 어떤 가치를 덧입히겠냐. 새삼.. 사회과 종합 모형의 중요성이 확실히 체감되었다.
경영이 뭔데?
나는 경영은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술이면 마땅히 개인과 사회 전체의 삶의 질 향상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경영은 이윤 상출에, 가계의 생계에, 국가의 성장에 등등... 그 과정에서 공익을 저해하면 안되니까 다같이 잘먹고 잘살자고 ESG가 나온거 아닌가? 그럼 경영으로 그런걸 달성하기 위해 학생은 뭘 알아야 하는데?
내가 면접 연습을 도와준 애는 그걸 위해 통계와 심리학을 활용한 애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계속 알려주었다. 경제를 안들어서 경제 개념도 지도하고.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지만 면접을 도와주기 전보다는 나름의 방향성을 갖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졌다고 확신한다. (그래도 이왕이면 꼭 합격해주면 좋겠다)
3. 수사국 프로젝트
우리는 무엇을 할 줄 알아야 하는가
되고 싶은 것이 뚜렷하려면 본인이 무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 같다.
그게 꼭 진로나 직업으로 이어지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선택의 순간에 이정표는 확실히 되어주지 않을까?
수(학)사(회)국(어) 프로젝트는 융합과 멋진 생기부에 초점을 맞추고 시작한 창체 수업이지만, 상기의 어려운 과정들을 겪고 나니 학생들의 건강한 자아 만들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1)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2) '쓸모있음'은 무엇인가?
3) 쓸모있는 것은 '좋은 것'인가?
를 중심으로, '맥락을 활용한 글 읽기', '사회 조사 방법론', '통계 분석'을 가르쳐보기로 했다.
실습이 필요하다는 ㅇㅂ도비의 말에 일단 영화를 골라서 ㅅㅎ도비와 관람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강의 수업 흐름대로 진행해봄.
쌤은 어떤 걸 보고 '좋은 영화였다'고 해요?
여기서부터 팀플 실패.
ㅅㅎ도비는 '이야기거리'가 있는 영화를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영화의 연출이든, 배우의 연기든, 미장센... 작품성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에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반대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고유한 특징이 강한 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현실에서도 충분히 피곤한데 가상의 스토리까지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예전엔 그래도 잘 이겨내고 본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해진다.
ㅅㅎ도비가 내게 재미있게 본 영화가 뭐냐고 물었다. 난 정말 단호하게 <세 얼간이>를 꼽았다. 마냥 흥겹고 위기감이 들지 않는 그 흐름이 너무 좋다고. 같은 맥락으로 웹소설도 좋아한다. 뭘 읽든 비슷한 플롯인게 그렇게 안정감이 들 수가 없다. 괴롭지 않다. 나는 작품을 볼 때 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인거다. 그 정점이 먼치킨 주인공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그래서 일단 ㅅㅎ 도비의 취향을 중심으로 실습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스프레드 시트로 준비해간 기생충 관람평 일부.
첫번째 리뷰부터 난관 봉착ㅋㅋㅋㅋㅋㅋ
그치만 기준을 ㅅㅎ도비의 취향과 리뷰의 맥락읽기로 잡으니 40분 정도를 투자해서 15개의 리뷰에 대해 논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이었다.
나: 현실 같은 상상, 상상 같은 현실? 계급 갈등만 현실이고 나머지는 허구라는 의미일까요? 근데 왜 9점이지? 1점은 어디서 없어진거지?
ㅅㅎ도비: 그러게요. 영화나 문학 작품은 원래 현실을 담아내는 허구의 이야기인데. 상상이 과한 부분이 있어서 별로였단 걸까요?
나: 아, 그런가? 지하실에 사람이 산다는게 좀 현실에 있을 법한 일은 아니긴 해요.
ㅅㅎ도비: 그게 감점의 이유가 되려나요?
아니면,
( '심장 쫄깃해서 죽는줄....(8점)'이라는 리뷰를 보고 )
ㅅㅎ도비: 심장이 쫄깃해서 죽는줄, 에다가 2점 감점이면 ㅎㄹ쌤(나)이랑 같은 취향인 사람인걸까요?
나: 아 그럴지도! 저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게 싫으니까. 근데 그건 ㅅㅎ쌤 입장에서는 '좋은'거 아니에요?
ㅅㅎ도비: 그렇죠. 그 반전이 있을 것 같은 흐름과 실제로 예상 밖의 결말이면 이야기거리가 생기니까.
나: 그러면 이 리뷰를 쓴 사람은 8점이어도, 쌤이 받아들이는 저 리뷰는 사실 10점짜리겠네요.
뭐 이런 것.
학생들도 취향과 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느 정도 쳐내니 ㅇㅂ도비가 보강에서 돌아와서 오렌지3 프로그램 활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형태소 단위로 문장을 쪼갠다는 것, 감정 단어에 점수를 부여하는 법, 점수 부여할 때의 척도 뭐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감정도 애들마다 부정/긍정/중립을 다르게 나눌 거니, 개인 감정 사전을 만들어야겠다고 했다. ㅅㅎ도비와 관람평을 분석하면서도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 꽤 많았다. 자신의 살아온 경험에 의해 반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점을 명시적으로 발견해냈을 때의 신선함이란!!!! 애들도 분명 하다보면 세계가 넓어지겠지?
만나서 얘기하니 수업이 구체적으로 잡혔다. 이 프로젝트를 해내고 나면 애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가치판단, 타인의 말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는 것 등등 살면서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들을 자신만의 필터로 걸러내서 받아들이고, 자신의 필터 모양에 대해 더 상세히 알게될 거다.
그런 연습을 하다보면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길거고, 뭘 하더라도 '그냥' 보다는 '그래서'가 떠오르겠지.
자아가 뚜렷해질거다. 생기부도 정체성과 스토리가 생길거고, 필요하다면 그런 자신을 면접에서 어필도 해보고.
실제 수업 결과는 3주쯤 뒤에 정리될 예정😶🌫️
다 하고 나면 내가 목표로 했던 학생의 뚜렷한 취향 만들기와 도비즈의 공동 목표였던 '좋은 생기부'에 대해서 논해볼 수 있겠지.
많은 영감을 주는 ㅇㅂ도비나, 섬세하고 부드러움으로 자신과 주변을 다듬는 ㅅㅎ도비나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다.
나는 생각이 정돈되지 않고 늘 하나씩 튀어 나가는 사람이라 그 둘의 정돈된 느낌을 좋아한다. 같이 있으면 머릿속이 정리가 되니까.
혼자 준비하던 수업이랑은 비교도 안되게 다듬어진 계획과 실습 내용을 보니 그저 감동.. 먹먹.. 찌잉... 흑흑
빨리 수업을 펼쳐보고 싶고, 애들에게 지식 전달이나 기능 외에 가르치고 싶은게 생긴 건 처음이다.
교사는 교사 간에는 독립적인 직업이라 생각했는데, 협력하고 자신의 것을 펼쳐보니 협동이 매우 중요한 직업이었다. 협동을 가르치면서 우리는 독립적인건 웃긴 일이긴 하다.
많이 배운다 항상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워요
항상 내 수업철학 뮤즈가 되어조,,